해주오씨의 연원(海州吳氏 淵源)
주태왕(周太王)에 삼자(三子)가 있었으니 장자(長者)는 태백(泰伯)이요, 중자(仲子)는 중옹(仲雍)이고 계자는 계력이다.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으니 이분이 후일 주문왕(周文王)이다. 태왕은 창(昌)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 전위(傳位)하려하나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있어 말을 못하였더니 태백(泰伯)이 부친(父親)의 뜻을 알고 아우 중옹(仲雍)과 함께 멀리 장강(楊子江)을 건너 살았으니 지금의 강소성오현(江蘇省吳縣)이다.
그 지방 사람들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섬겨 오태백(吳泰伯)이라 하였다.
후일 공자(孔子)께서 칭찬하여 이르되 「태백(泰伯)은 지극한 덕(德)을 가진 분이로다. 천하를 사양(辭讓)하였어도 사람들은 아는 이가 없었다」하였다.
오국시대(吳國時代)는 희씨(姬氏)로서 주실(周室)과 동종(同宗)의 의(誼)를 지키며 고소(姑蘇)에 도읍하였으니 그 고소(姑蘇)는 지금의 소주(蘇州)이다. 그 후 BC 473년 월구천(越句踐)에게 멸망되니 25대 759년이며 그 자손들이 국호(國號)로서 성씨(姓氏)를 삼았으며 「오후위월소멸자손국호위성씨(吳後爲越所滅子孫國號爲姓氏)」라 했다. 후손이 번연하여 중국에 275 본관(本貫)이 전해지고 있고 우리나라에는 해주(海州)를 위시(爲始)하여 19개 본관(本貫)으로 전하나 모두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이해되고 있다.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시조 오인유(吳仁裕)공은 학덕을 겸비한 대학자로서 고려 성종3년(984년)에 중국에서 건너와 해주에 살며 나라에 벼슬하였다. 성종(成宗)은 공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잘 알고 있음을 알고 특별히 진급시켜 군기감과 예부의 일을 맡겼다.
공은 성종7년에 임금에게 아뢰어 오묘(五廟)와 사직(社稷), 그리고 다음해에는 태묘(太廟)와 국자감(國子監국립대학)을 세워서 새로운 문화와 국민교화에 힘썼다.
1481년 영상(領相) 노사신 등 24명의 공경(公卿)과 거유(巨儒)가 임금에게 올린 글에 「고려 예종때 윤관(尹瓘)장군과 오연총(吳延寵)장군이 여진을 물리쳐 서북(西北)은 압록강을 한계로 삼고 동북(東北)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으니 대개 서북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나 동북은 그보다 지나쳐 지리의 성(盛)함이 극(極)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북쪽으로 7백리에 있고 송화강변이니 두분이 거기까지 나가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를 세웠다. 오연총장군은 1107년 윤관장군과 함께 여진을 물리치고 두만강북 7백리에 있는 선춘령에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를 세운 것이다.
지금은 그 곳이 조선족 연변자치주이니 비록 국력은 미치지 못해도 5백여년전 성종과 노사신 등이 발행한 《동국여지승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시조 인유공께서 해주에 정착하신지 1천여년된 지금은 우리나라 11번째 대성(大姓)이며 그동안 국가에 헌신한 열사(烈士)와 대학자, 효자 효부들이 많았고 국가기관에는 위로는 상신(相臣)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수많은 종친들이 공헌하여 대내외적으로 찬란한 업적을 쌓았고 지금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
해주오씨 가문중 또 하나 이름있는 분은 오형공(吳詗公)으로 초명은 한경이며 문장이 뛰어난 대학자로서 명성이 높았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이르렀다.
조선조에는 상신(相臣), 대제학(大提學), 호당(湖堂), 문장가(文章家), 공신(功臣), 충신(忠臣), 렬사(烈士), 청백리(淸白吏), 부마(駙馬)와 문무(文武) 급제자가 수백명에 이르고 효자, 효부 등의 그 위용이 종중(宗中)의 긍지로서 청사(靑史)에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