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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坡公神道碑銘[?](천파공 신도비명[휘숙])

昔在仁廟中興英俊之士蔚然?起或以文學名或以政事顯然其才術之備有而兼長者亦鮮矣才難不其然乎以余所聞天坡吳公其庶幾乎入則??王猷潤色鴻業與?澤諸公??文苑出則歷典藩坦茂著績用不替承流幹方之責左右俱宜無族不可若公者非所謂長才異能身兼數器者耶公沒後六十餘年其孫海昌尉泰周謂有累世之好以狀請銘於錫鼎義何可辭按狀公諱?字肅羽系出海州遠祖仁裕高麗軍器監監曾祖諱壽億慶尙左水軍虞侯贈兵曹判書祖諱定邦慶尙右兵馬節度使考諱士謙宗親府典簿贈議政府左??貞敬夫人李氏漢城府庶尹贈吏曹?判時中女以萬曆壬辰七月三日生公當娩之前夕大夫人有異夢生而神骨瑩澈?秀異甚五歲學史書未半卷文理己進甫十餘歲文藝日富詞藻溢發籍籍稱神童五峯李延陵?過陽城村庄公以所爲程式詩賦請雌黃李公見之曰非吾所可評因命韻爲詩遂屬和而去自是?屋選試輒入高第年十九中進士越三年壬子登增廣文科公弱冠取科名如承?拾芥而無自滿色前輩長者咸稱之唱第日?拜韓久庵百謙久庵書厚字贈公曰以此一字行世足矣權知承文院正字時有奏聞天朝事白沙漢陰月沙諸公列坐朝堂將草奏公以槐院郞執筆諸公連聲口占公略無凝滯筆翰如流漢陰顧謂吏判曰如此人才何不置之淸路翌日拜侍講院說書旋移禮曹佐郞時朝廷日昏倫常將?公不樂求官達日與?谷白洲諸公唱酬自娛??讀書於三角山中夜以繼日勤?如學究生己未拜兵曹佐郞時弘立有深河之敗以陳奏使書狀官赴京庚申出爲槐山郡守歲大飢公悉心?賑峽民無損瘠未滿百日政聲己著?臣李挺元家在邑治慄勢張甚以吏曹?議請由歸家徵責多端公非徒不應又不肯出見挺元怒發悖語笞郡吏以辱公公乃杖其族黨及家??而歸遂以此坐罷秋爲巡檢使從事官?巡三南辛酉以從事官從韓元帥浚謙于闕西軍務之暇日講詩禮韓公?稱之曰廊廟器也有大事必咨焉癸亥春仁祖反正?日拜司諫院正言旋移司憲府持平時承昏朝?亂之餘中外抱寃者衆?起來訴日以百數公據法決事執論峻正尤以振飭風紀爲先時有外戚新?勳者數人恃恩縱恣公彈冶抵罪風裁?然朝紀日嚴遞拜成均館直講累拜弘文館修撰校理常帶知製敎韓西平旣識公才時爲都體察使筵白吳某可大用忠淸缺方伯遂以公擬望五品官擧擬按察特以材望之?出也移拜司諫院獻納與被湖堂之選盖藝苑極榮也仁城君珙累爲逆囚所援告廷議將置之死公奏曰骨肉雖有罪理當保護不宜盡律?時議遞付成均館司藝尋遷司憲府掌令甲子春逆适擧兵反上幸湖西公以校理從時車駕甚急未及奉廟社主公中途馳還趣廟社乃行領相李完平聞而賢之登對稱奬上亦加寵褒駕次果川夜己三?公曾以幕僚出入邊障熟知西南事時入侍燭前條陳賊路形勢及設機制勝之策指?明切上動容稱善時元帥張公?賊兵師左次李延平貴禦臨津亦潰公上?請以法繩之?嚴軍津且劾兩司不論之失旋移司諫院司諫駕還以扈從勞陞通政階銓部以未經準職引例持之上特命進秩拜兵曹?知先時大妃遺陳奏使李慶全等陳廢立狀因請?封誥命天朝入流言使登萊撫院遺差官?島招我國廷臣核問事實而去及陳奏使回天子只降勅?封而不許誥命冕服朝廷甚憂之將遣使奏請兼謝勅命簡公爲副使當是時淸人己據遼廣燕路阻梗使价皆航海以達先公銜命者數輩相繼沒溺朝臣視爲死地皆避莫肯行三改命而及公公受命不少見幾微色及泛海遇?風舟幾覆者數舟中人呼泣無人色公怡然危坐賦詩不輟舟中恃而爲安行過齊趙之墟歷數百千里公容止閑雅又善華語華士見者無不敬而慕之爭投詩以求和及至皇朝用文字抵諸部詞意痛?就閣部諸公口對面陳亦皆明核天朝諸公莫不首肯讚歎事竟準請旣還仁祖嘉之賜土田臧獲以?其功時乙丑四月也行中象胥有干禁者臺官劾使臣不能校飭啓請罷職未幾牽復丙寅拜淸州牧使其夏詔使王夢尹姜曰廣來公以製述官承召至都兩使素伉高少可得公詩輒賞美待之有加尋遞歸陽城丁卯虜警猝至公疾馳赴朝道拜同副承旨扈入江都賊退隨駕還秋闕東賊李仁居反命遞方伯難其代朝議非公莫可遂授闕東節率輦下親兵?討之柳琳爲中軍申景?爲別將元振河爲從事官?日啓行行未至賊魁就擒公至則按治餘黨寬其脅從軍民大安戊辰夏以親病遞歸旋拜右承旨兼司饔尙衣院提調秋遭典簿公憂服?拜刑曹?議移承旨卒未陳疏乞便地以養老母拜驪州牧使旋遞拜禮曹?議移承旨未幾拜慶尙監司嶺南統七十州俗斷斷健訟素稱難治公廉以持己簡以制煩威惠幷族裁斷如流案上無留牘黜陟公而嚴州縣振肅聲績大著簿書之暇讀古書日有課程壬申秩滿遞付僉樞旋移左承旨兼承文副提調亦文階極選也癸酉秋海西伯缺朝議以西事方殷乃授公黃海監司是日又擬闕西伯廟堂之器重如此是時邊境日急元帥留鎭黃州毛文龍據?島需索無己公左右策應不以煩民海人皆按堵其冬天將程龍奉勅公出候境上程公得公詩文歎曰吳觀察文章如江海也其留京館取公詩?諸壁上讀輒拱手稱?後遇我人必詢公起居使命之來必致書問明年秋以病遞還時天朝禦史黃孫武來?島朝廷以公爲接伴使公己視憊而彊事也不敢辭?起馳赴及還到松都猝病風不能言守臣以聞上遣內醫診視賜藥物竟以十月二十九日卒于松都享年四十有三訃聞仁祖驚悼命沿路護喪吊祭賻?如儀且下敎曰吳??悟多才以國事死於道予甚閔惻其特爲追贈該曹奉旨贈吏曹?判兼兩館大提學其十二月永?于陽城天德山枕亥之原從先兆也夫人固城李氏?判成吉之女性寬而莊婦德甚備事舅姑愉婉雖貧約脂隨必盡誠奉祭以禮躬執??必虔待諸叔曲有恩禮諸叔亦事之甚謹閨儀穆如宗黨視以爲則與公同年生甲寅二月三日卒享年八十有三?葬公墓擧一女爲沈碩慶妻而無丈夫子公甲子赴燕時命夫人取養仲氏諱翔之子爲後名以斗寅後數年生子斗龜國俗旣立後而有己出則輒以衆子畜爲後者或罷繼還宗公援宋朝胡文正故事而不從俗知禮者善之斗寅文科壯元官至刑曹判書當己巳仁顯之遜也抗章殉節坤位之復特贈領議政諡忠貞斗龜後公三年而夭忠貞凡三娶有五男五女男長觀周生員有文行早歿次鼎周監察次?海昌尉晋周履周俱業文女適府使南宅夏判官金昌說校理崔昌大幼學金令行待敎李縡曾孫男女若干人忠貞旣貴加贈公吏曹判書又以海昌推恩贈議政府左?成夫人從贈貞敬夫人公美鬚髥目光烱烱容采?潤映帶數人?雅而簡潔明敏而峻整中心樂易與物無競平居寡默若不以事物經心而至臨事是非辨得失一裁以衷英氣奮發通鍊時務動合機宜規?有條理凡所設族後來者不能輒?斤斤奉三尺不撓當官坐衙不嚴而威豪猾吏抑首不敢仰視所至恒有去後思內行篤備事親奉祭極其誠居親喪盧墓三年處諸弟愛而能誨御家衆恩而有制平生不問家人産業立朝二十年累建蕃節田?無所長益顧?好讀書況浸諸家醫藥卜筮天文?數異端老佛之書靡不旁通尤深於易每公退終夕伊吾?外之迹可數也爲詩操筆立就渙若不思而篇出藻采?燁聲韻?洋早以詞賦鳴?屋人謂得楚騷之遺文亦遵麗有古作者風使之天假其年則其才猷文采宜不止是而竟夭閼於中道惜哉有文集四卷行於世銘曰果藝以達聖許從政兼能具長君子猶病?嗟吳公才實挺?墳索之?貫穿緯經遇事投刃恢然肯?旣貯閨掖亦界翰?溟海漫瀾蛟?怒橫涉陟如夷忠勞益炳?翔皇國?接使命蔚爲邦華文采郞映惟其有之豈無根領能養善喪率由至性少喜??其旨洲泳質有其文衆美叢?虛位以俟事樞詞柄胡旣試之而用弗竟胤嗣寫奕庶篤厥慶我詩其墓永垂光耿

議政府領議政崔錫鼎撰

[譯解]

옛적 인묘(仁廟)가 중흥(中興)할 즈음 영민하고 준수한 선비들이 성하게 일어나 혹은 문학(文學)으로 이름을 떨쳤고, 혹은 정사로 현달하였으나 재지(才智)나 학술(學術)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두가지 모두 잘하는 사람은 또한 적었다. 재주를 타고난 것이 어려움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내가 들은바로 천파 오공(天坡吳公)이 여기에 가깝지 않겠는가? 조정(朝廷)에 들어가면 왕유(王猷:임금이 행해야 할길)를 보불(??:수놓아 빛나게 함)하고 홍업(鴻業:나라에 큰사업)을 윤색(潤色:윤택이 나는 빛)하여 계곡(谿谷:張維)택당(澤堂:李植)등 제공(諸公)과 함께 문원(文苑)에 오르내리고, 나가면 번원(藩垣)을 두루 맡아 저무(著茂:성하게 나타남)와 적용(績用:功績)이 쇠퇴하지않고 계승되어 내려왔고 간방(幹方)의 책임이 좌우(左右)에 모두 적합하여 어디에나 베풀어도 옳지 않음이 없다.

() 같은 이는 이른바 재주가 남보다 낫고 뛰어난 재능으로 몸은 수기(數器:저울)를 겸한자가 아니겠는가. 공이 돌아가신지 육십 여년(六十餘年)에 그 손자 해창위(海昌尉) 태주(泰周)가 여러대로 호의(好誼)가 있다고하여 행장(行狀)으로 석정(錫鼎)에게 명()을 청()하니 의리상 어찌 가히 사양하리요.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숙(?)이고 자()는 숙우(肅羽)이니 계보(系譜)가 해주(海州)에서 나왔다. 원조(遠祖)인 인유(仁裕)는 고려군기감(高麗軍器監)이고 증조(曾祖)인 수억(壽億)은 경상좌수군우후(應尙左水軍虞侯)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인 휘 정방(定邦)은 경상우병마절도사(慶尙右兵馬節度使)이고, ()인 휘 사겸(士謙)은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에 추증되었고, (?)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시중(時中)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임진(壬辰, 一五九二) 칠월 삼일에 공을 낳았다. 해산(解産)하던 전날 저녁에 대부인(大夫人)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 태어나서는 신골(神骨)이 형철(瑩澈:환하게 비치도록 빛남)하고 재능(才能)이 남보다 뛰어나서 오세(五歲)에 사서(史書)를 배우는 데 반권(半卷)도 못 배워 이미 문리(文理)를 깨달았다. 겨우 십여세(十餘歲)에 이르러 문예(文藝)가 날로 발전했고, 사조(詞藻:詩文의 문체)가 넘쳐 발동하니 신동(神童)이라고 자자하게 일컬어졌다. 오봉 이연릉(五峰李延陵:好閔)이 일찍이 양성(陽城) 촌장(村庄)을 지나가는데 공이 일정한 법식으로 시와 부()를 지어 자황(雌黃:字句添削)을 청하였더니 이공(李公)이 훑어보고 말하기를 내가 평론할 바가 아니다 하고, 인하여 운()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마침내 이어 화답하고 떠났다. 이로부터 과거 시험을 보아 선발하는데 그 때마다 고과(高科)에 들어갔다. 나이 열 아홉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고 그 뒤 삼년(三年)만인 임자(壬子)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였다.

공이 약관(弱冠:二十一)에 과명(科名: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얻은 것이 승조습개(?拾芥:무엇이든지 얻기가 쉽다는 비유)와 같았지만 스스로 만족한 기색은 없었으니 선배(光輩)와 윗 어른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급제한 사람들을 호명(呼名)하던 날 한구암백겸(韓久庵百謙)을 찾아가서 보니 구암(久庵)이 후자(厚字)를 써서 공()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한글자로 행세(行世)해도 족()하다 하였다.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로 있을 당시 천조(天朝:중국)에 주문(奏聞) 할 일이 있었다. 백사(白沙:李恒福) 한음(漢陰:李德馨)월사(月沙:李廷龜) 등의 제공(諸公)들이 조당(朝堂)에 열좌(列坐)해 있는 앞에서 주문(奏文)을 초 하려는데 공()은 괴원랑(槐院郞)으로서 붓을 잡았다. 제공(諸公)들은 소리를 내어 계속해서 읊는데도 공은 조금도 막힘이 없이 필한(筆翰)이 물흐르듯 하였다. 한음(漢陰)이 이조판서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같은 인제(人才)를 어찌 청로(淸路:맑은벼슬)에 쓰지 않는가 하였는데 이튿날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에 임명되어 곧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겨졌다. 이때에 조정(朝廷)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인륜의 떳떳한 도리는 무너지려하니 공은 벼슬로 현달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날로 계곡(谿谷:張維)이나 백주(白洲:李明漢) 제공(諸公)詩歌文章을 주고 받으면서 스스로 즐겼고, 가끔 삼각산중(三角山中)에서 글읽기를 밤부터 다음날까지 계속하여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마치 학구생(學究生)과 같았다.

기미(己未, 一六一九)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홍립(弘立:성은 이다)이 심하(深河遼東)에서 패하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中國)에 갔었다. 경신(庚申, 一六二)에 괴산군수(槐山郡守)가 되었는데 그해에 크게 흉년이 들어 공은 정성을 다해서 곤궁한 백성을 구휼해주니 산골의 백성들이 쇠약하고 수척함이 없었고, 백일(百日)이 못되어서 정사(政事)를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때에 얼신(?)인 이정원(李挺元)이가 치읍(治邑:읍내)에 살면서 세도를 믿고 과장이 심하였는데 이조참의(吏曹?)로서 말미를 얻어 집에 돌아와 여러 가지 조건으로 빚을 거두어 들이니 공은 다만 불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나가서 보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정원(挺元)이 몹시 화를 내어 도리어 거짓말을 하고 군()의 아전을 때려 공을 욕보이니 공은 이에 그 일가 친척과 집안의 종을 벌로 매를 치고 나서 관직(官職)을 버리고 돌아갔는데 마침내 이 일로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가을에 순검사(巡檢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삼남(三南)으로 가서 두루 살폈다. 신유(辛酉, 一六二一)에 종사관(從事官)으로 한원수(韓元帥)인 준겸(浚謙)을 따라 관서(關西)에 가서 군무(軍務)에 힘쓰며 여가를 이용하여 날마다 시()와 예()를 강론하였다. 한공(韓公)이 자주 칭찬하기를 낭묘(廊廟:議政府)에 합당한 사람이다 하며 큰일이 있을 때 마다 반드시 자문(諮問)하였다.

계해(癸亥, 一六二三)년 봄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그 날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고 곧바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다. 이때에 혼조(昏朝)의 썩고 문란한 기회를 당해서 중외(中外)에 원통함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 호소 하는 자가 날로 수백(數百)이 되었으나, 공은 법에 의거하여 일을 결단하고 논란을 집행하기를 엄격하게하여 바로 잡았으며, 더욱이 풍기(風紀)를 진작(振作)시키고 단속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았다. 때로는 외척(外戚)이 새로이 훈()에 참여한 몇 사람이 이 은혜를 믿고 제마음대로 하니 공이 탄핵해서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형벌을 내렸다. 공은 뛰어난 식견과 위엄이 있고 조정(朝廷)의 기강이 엄하여지매 체직(遞職)이 되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었고 여러번 승진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에 임명되었고 언제나 지제교(知製敎)를 맡고 있었다. 한서평(韓西平)이 이미 공의 재주를 알고 있는지라 그때에 도체찰사(都體察使)가되어 연백(筵白:임금 글자리 經筵에서 보고함)할 때 오모(吳某)는 크게 쓸만하다고 하였다. 마침 충청도(忠淸道)에 방백(方伯)의 결원(缺員)이 있어 마침내 공()을 오품관(五品官)에 의망(擬望:후보자 삼명을 천거함)하는데 뽑히어 안찰(按察)에 의뢰되었으니 특별히 공의 제주와 명망(名望)에서 나온 것이다. 또 옮겨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어 호당(湖堂)의 선()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대개 예술의 사회에서는 극진한 영화이다.

인성군(仁城君) (:仁祖의 아우)이 여러번 역적(逆賊)의 죄수 입에서 원고(援告)한 바가 되었다. 조정(朝廷)의 여론(與論)으로는 장차 죽이려고 하니 공은 아뢰기를 골육(骨肉:兄弟)이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도리는 마땅히 보호해야 하는데 모두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하여 당시의 여론을 거스려 체직(遞職)되어 성균관 사례(成均館司藝)에 임명되고 얼마 안되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갑자(甲子, 一六二四)년 봄에 역적(逆賊)인 이괄(李适)이 군사(軍士)를 일으켜 모반(謀叛)하니 임금이 호서(湖西)로 행행(幸行)하였는데 공은 교리(校理)로 있으면서 따라갔다. 이 때에 거가(車駕:임금이 탄 수레)가 몹시 급하여 미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모시지 못하였는지라 공은 중도(中途)에 말을 달려 돌아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재촉하여 따랐다. 영상(領相)인 이완평(李完平:李元翼)이 이 소문을 듣고 좋게 생각했으므로 등대(登對)하여 장하다고 칭찬하니 임금도 또한 총포(寵褒:표창의 은혜 입음)하였다. 임금의 행차(行次)가 과천(果川)에 당도했는데 이미 삼고(?:밤 열두시 경)가 되었다. 공은 일찍이 막료(幕僚)로 변장(邊障)을 출입하여 익히 서남(西南)의 일을 알고 있었다. 이때에 촛불 앞에 입시(入侍)하여 적로(賊路)의 형세와 설기(設機:기회를 만듬) 및 승리의 계책을 조목별로 써서 진술하고 손가락으로 명백(明白)하게 가르쳐주니 임금이 안색(顔色)을 바꾸면서 잘한다고 칭찬 하였다. 이때에 원수(元帥)인 장공(張公:張晩)이 적병(賊兵)에게 밟히었고 수좌 차(帥左次)인 이연평(李延平:李貴)이 임진(臨津)을 방어(防禦)하다가 또한 무너졌다. 공이 차(?:전갈)를 올려 법으로써 다스릴 것을 청()해서 군률(軍律)을 엄하게 하였고 또한 양사(兩司:司憲 司諫院)에서 논하지않는 실책(失責)을 탄핵하였다. 조금 있다가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옮겨졌는데, 환가(還駕:임금이 돌아옴)하여 호종(扈從)했던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에 올랐는데 전부(銓部:文武官을 전형하는 벼슬)에서는 준직(準職:堂下官으로서 가장 높은 당하 正三品 벼슬)을 거치지 못했다고 해서 예()에 의거(依據)해야 한다고 말하니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품계(品階)를 올려주고, 병조참지(兵曹?)에 임명했다. 이에 앞서서 대비(大妃)가 진주사(陳奏使:중국에 奏文을 가지고 가는 사신)인 이경전(李慶全) 등을 보내어 폐립(廢立:임금을 폐하고 새로 임금을 맞아 세움)한 상황을 진술하고 인하여 책봉(?)해 달라는 고명(誥命:직첩을 수여하는 사령장)을 청하니 천조(天朝:중국의 조정)에 뜬 소문이 들어가 사신이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무원(撫院:중국의 관공서의 칭호)으로 하여금 차관(差官)을 가도(?)에 보내어 우리나라 조정(朝廷)의 신하들을 불러 사실을 조사해보고 갔었다.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오자 천자(天子)가 다만 책봉(?)한다는 칙명(勅命)과 면복(冕服:正服)은 허락하지 않았으니 조정(朝廷)에서 매우 근심 하였다. 장차 사신을 보내어 주청(奏請)하고 겸하여 칙명(勅命)을 내린 데에 대한 사례로 공을 선발하여 부사(副使)로 삼으니 이때를 당해서 청()나라 사람이 요광(遼廣:요동성과 광동성)을 점거하고 있으니 연로(燕路:중국에 가는 길)가 막혀 사신들이 모두 뱃길로 도달하였다. 공보다 먼저 명령을 받들고 간 두어 사람들은 서로 이어 빠져 죽었다. 조신(朝臣)들이 죽을 곳이라 하여 모두 피하고 가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이나 고쳐서 명 하였는데 공은 명을 받고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서 구풍(?:바다에서 일어나는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히려고 한 적이 두 번이나 되니, 배 가운데의 사람들은 부르짖으며 거색이 없었으나 공은 의연히 꿇어앉아 시() 짓기를 그치지 않으니 배 가운데의 사람들은 믿고 안심(安心) 하였다. 행차(行次)가 제()와 조()의 옛 수도(首都)를 지나 수천리(數千里)를 갔는데 공의 기거동작(起居動作)이 점잖하고 품위가 있었다. 또한 화어(華語:중국말)를 잘하여 만나는 화사(華士)마다 공경하고 흠모(欽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다투어 시()를 주면서 화답(和答)을 요구 하였다.

황조(皇朝:중국의 조정)에 이르러 글을 지어 모든 부서(部署)에 주니 사의(詞意:글뜻)가 매우 적절하였고 각부(閣部)의 제공(諸公)에게 나아가 말로 대답하고 대면(對面)하여 이야기하는데도 또한 모두 명확하고 확실하였다.

천조(天朝)의 제공(諸公)들도 수긍(首肯)하고 칭찬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일이 마침내 준청(準請:청을 들어줌)이 되어 돌아오니 인조(仁祖)가 가상히 여겨 토전(土田)을 하사(下賜)하고 장획(臧獲:사내종과 계집종)으로 그 공을 치하했다. 그때가 을축(乙丑, 一六二五)년 사월(四月) 이었다.

동행하던 모든 사람 가운데 상서(象胥:譯官)에 간금(干禁)이란 자가 있는데 대관(臺官:司憲府大司憲)에서 탄핵하니 사신(使臣)이 미처 교칙(校飭:단속)하지 못해 계청(啓請)하여 파직(罷職) 되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견복(牽復:복직) 되었다. 병인(丙寅, 一六二六)년에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 되었는데그해 여름에 중국(中國)의 조사(詔使)인 왕몽윤(王夢尹)과 강왈광(姜曰廣)이 오니 공()은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다. 양사(兩使)가 원래 거만하고 뽐내었는데 조금 있다가 공의 시()를 얻어보고 문득 찬미(讚美)하면서 대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조금있다가 체직(遞職)되어 양성(陽城)으로 돌아 갔었다.

정묘(丁卯, 一六二七)년에 오랑캐의 사변(事變)이 갑자기 일어나자 공은 빨리 달려 조정(朝廷)에 가는 도중에 길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고, 강도(江都:강화도)에 호종(扈從:임금의 뒤를 따라감)하고 들어갔다. ()이 물러가자 임금을 모시고 돌아왔다. 가을에 관동(關東)의 적()인 이인거(李仁居)가 명령을 거역하여 방백(方伯)을 교체하려 하는데 그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조정의 의논이 공이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관동절(關東節)에 임명되어 연하(輦下:서울밑)의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討伐)하려고 하였다. 유림(柳琳)이 중군(中軍)이 되고 신경인(申景?)이 별장(別將)이 되고 원진하(元振河)가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그날로 출발 하였다. 행군(行軍)이 당도하기도 전에 적의 괴수를 잡았고 공이 도착해서는 여당(餘黨)을 조사하여 다스렸다. 그 적()에게 위협을 못 이겨 복종한 사람들을 용서해주니 군()과 백성들이 크게 안심 하였다. 무진(戊辰, 一六二八)년 여름에 어버이 병환으로 체귀(遞歸)되었고, 조금 있다가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어 사옹원 상의원제조(司甕院尙衣院提調)를 겸하였다.

가을에 전부공(典簿公)의 우()를 당하여 복()을 벗고 형조참의(刑曹?)에 임명되어 승지(承旨)로 옮겼다.

신미(辛未, 一六三一)년에 변명하는 소()를 올려 편지(便地:편한 땅)에 가서 노모(老母)를 공양(供養)하겠다고 청()하여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었다가 곧 遞職되어 형조참의(形曹?)에 임명되었다. 승지(承旨)로 옮겼다. 얼마되지 않아서 경상감사(慶尙監司)에 임명되었는데, 영남(嶺南)은 통털어 칠십주(七十州). 습속(習俗)에는 승벽(勝僻)이 대단하여 송사(訟事)하기를 즐겨서 원래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었는데 공은 청렴함으로 처신(處身)하고 간략한 것으로 번거로운 것을 제재하고, 위엄과 은혜를 함께 베풀어 제결(製決)하는 것이 물흐름 같아서 안상(案上)에 머물러있는 문서가 없었고 유공자는 올리고 공이 없는 자는 내어 쫓는 데 공정(公正)하고 엄하게 하니 주()와 현()이 두려워서 떨고 삼가하니 명성(名聲)은 계속해서 크게 떨쳤다.

부서(簿書)를 정리하는 여가에 고서(古書)를 읽으면서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었다. 임신(壬申, 一六三二)년에 질만(帙滿:관직의 임기가 만료 됨)하여 체직(遞職)되어 첨추(僉樞)에 임명되었는데 곧 좌승지(左承旨)로 옮겨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했으니 또한 문계(文階)로는 특별히 뽑힌 것이다.

계유(癸酉, 一六三三)년 가을에 해서방백(海西方伯)이 궐석(闕席)되었으므로 조정(朝廷)의 의논은 서쪽 일이 바야흐로 급하다고 해서 곧 공을 황해감사(黃海監司)에 임명하고 이날로 또 관서방백(關西方伯)의 후보자에 천거되었으니, 묘당(廟堂)에서 기국(器局:재기와 국량)을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이때에 변경(邊境)이 날로 급해져서 원수(元帥)는 황주(黃州)에 유진(留鎭)하였고 모문룡(毛文龍)은 가도(?)를 점거하여 머뭇거리면서 수색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은 좌우(左右)에서 계략을 써서 서로 도와서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니 해주(海州) 사람들은 모두 안도(安堵)하였다. 그때 겨울에 천장(天將:중국의 장수)인 정룡(程龍)이 칙명(勅命)을 받들고 왔었는데 공이 나가서 경상(境上)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공(程公)이 공의 시문(詩文)을 얻어보고 탄식하기를 오관찰(吳觀察)의 시문(詩文)은 강해(江海)와 같다고 하였다. 그가 경관(京館)에 머물면서 공의 시()를 가져다가 벽()위에 걸어놓고 읽을 때마다 공수(拱手:공경하는 뜻으로 손을 마주잡음)하고 칭찬하였으며 뒤에 우리나라 사신을 만나면 반드시 공의 기거를 물었고 사명(使命:칙사)이 오면 반드시 서신(書信)을 부쳤다. 다음해 가을에 병()으로 체직되어 돌아왔다.

이때에 천조(天朝)에서 어사(御使)인 황손무(黃孫武)가 가도(?)에 왔는데 조정(朝廷)에서 공으로 접반사(接伴使)를 삼으니 공의 고달픈 것을 보면서도 무리하게 일을 하라고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일어나 달려가서 부임(赴任)하였다. 송도(松都)에 돌아오자 갑자기 풍병(風病)이 걸려 말을 못하였다. 수신(守臣:守令의 딴 이름)이 알리니 임금이 내의(內醫)를 보내서 병상(病狀)을 살피고 약물(藥物)을 하사(下賜)하였으나 마침내 시월 이십구일(十月二十九日)에 송도(松都)에서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사십삼세(四十三歲)였다.

부문(訃聞)하자 인조(仁祖)가 놀라서 슬퍼하였고 연도(沿道:큰길가에 있는 지역)에 명하여 호상(護喪)하게하고 조제(吊祭)하고 부사(賻賜)하는 것을 의례(儀例)와 같이 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오숙(?)이 뛰어나게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는데 국사(國事)로 길에서 죽으니 내 몹시 가엾게 여겨 마음이 아프다. 특별히 위하여 추증(追贈)하시니 해당 관서에서는 뜻을 받들어 이조참판(吏曹?) 겸 양관대제학(兼兩館大提學:홍문관 예문관)에 추증하라 하였다.

그해 십이월(十二月)에 양성천덕산(陽城天德山) 해좌(亥坐)의 언덕에 영폄(?:장사)하였으니 선조의 무덤을 따른 것이다.

부인(夫人)은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참판(?)인 성길(成吉)의 따님인데 성품이 너그럽고 단정하여 부인의 덕을 갖추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님을 섬김에 있어서 부드럽고 온순했으며 비록 가난해서 절약하여 살아갔지만 지수(脂隨:기름)로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고, 제사를 받드는데 예()로 하였고, 몸소 취사(炊事)를 하였다. 반드시 모든 시동생들을 공경히 대접하며 극진한 은례(恩禮)가 있으니 모든 시동생들도 또한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니 규중 법도가 화목하였고 종당(宗黨)이 본받아 법으로 삼았다. ()과 같은 해에 나서 갑인(甲寅, 一六七四)년 이월 삼일(二月三日)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팔십 삼세(八十三歲)로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공은 일녀(一女)를 두었는데 심석경(沈碩慶)의 아내가 되고 아들은 없었다. ()이 갑자(甲子, 一六二四)년에 부연(赴燕:중국에 감)할 때 부인(夫人)에게 명()하여 중씨(仲氏) 휘상()의 아들을 데려다가 후사(後嗣)로 삼고 이름을 두인(斗寅)이라 했는데 수 년 뒤에 아들 두귀(斗龜)를 낳았다.

나라 풍속에 이미 양자를 들이고 나서 자기 소생이 있으면 뭇 아들로삼고 길러서 후사(後嗣)로 삼은 자가 혹 파계(罷繼)하여 환종(還宗) 하지만 공은 송()나라 조정(朝廷)의 호문정(胡文定:)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풍속(風俗)을 따르지 않으니 예()를 아는 사람들은 좋게 여겼다.

두인(斗寅)은 문과(文科)로 장원(壯元)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는데 기사(己巳, 一六八九)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손위(遜位)할 때 상소를 올리다가 순절(殉節:충절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하였고, 왕후의 지위가 회복되자 특별히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를 충정(忠貞)이라 하사 받았다. 두귀(斗龜)는 공()보다 삼년(三年)뒤에 요사(夭死:일찍죽음) 하였다.

충정(忠貞)은 모두 삼취(三娶)를 했는데 오남 오녀(五男五女)를 두었다. 큰 아들 관주(觀周)는 생원으로 문행(文行)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고, 다음 정주(鼎周)는 감찰(監察)이고, 다음은 해창위(海昌尉)이고, 진주(晋周)이고, 이주(履周)인데 모두 문학(文學)을 업()으로 삼았다. 딸은 부사(府使)인 남택하(南宅夏), 판관(判官)인 김창렬(金昌烈), 교리(校理)인 최창대(崔昌大), 유학(幼學)인 김영행(金令行), 대교(大敎)인 이재(李縡)에게 출가(出家)하였고, 증손(曾孫)으로 남녀(男女) 약간인(若干人)이 있다. 충정(忠貞)이 이미 귀해지자 공()에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였고, 또 해창위(海昌尉)가 추은(推恩)되어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에 추증되었고, 부인(夫人)은 따라서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직(贈職) 되었다. ()은 수염이 아름다웠고 눈빛이 빛났다. 용채(容彩)는 어여쁘고 윤택이 나서 사람에게 비추었으며 온화(?)하고 간결(簡潔)했으며 명민(明敏)하고 엄숙하여 마음속으로는 즐겁게 편안하였다. 남들과는 다투는 일이 없었고 평상시는 침착하고 말이 없었다. 사물(事物)에는 개의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에 시비(是非)를 하거나 득실(得失)을 분변하는데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충심(哀心)으로 제재 하였고, 영기(英氣)가 분발(奮發)하여 시무(時務)에 통련(通鍊)하였고, 행동이 시기와 형편에 합하였고, 규획(規劃)하는데에는 조리(條理)가 있었다. 무릇 시설(施設)한 바를 뒤에 부임(赴任)한 자가 고쳐서 변경하지 못 하였다. 명찰(明察)하게 삼척(三尺)을 받들어 흔들리지 않았고 관()을 주관하여 관아(官衙)에 앉아 있으면 엄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어서 호탕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머리를 숙이고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언제나 거후사(去後思:떠난 뒤를 생각함)가 있었다. 내행(內行)이 독실(篤實)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데 정성을 다하였고, 친상(親喪)을 당하여 삼년(三年)동안 여묘(盧墓) 살이를 했으며, 모든 아우들을 사랑하고 잘 가르쳤으며 가중(家衆)을 통솔하는데 은혜로우면서 법도가 있었으며, 평생토록 가인(家人)의 산업(産業)을 물어보지 않았다. 입조(立朝)한지 이십 여 년(二十餘年)에 여러 번 번절(藩節:감사책임)을 하면서도 전답이나 노복이 더 늘어날 것이 없었다.

돌아보건대 일찍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제가(諸家)의 의약(醫藥), 복서(卜筮), 천문(天文), 산수(?)와 이단(異端)인 노자(老子)와 불씨(佛氏)의 글에 젖어들어 방통(旁通:조리가 자세하여 분명하게 함)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주역(周易)에 깊어서 언제나 공직(公職)에서 퇴근(退勤)하면 밤새도록 이오(?:글읽는 소리)했으니 문 밖의 발걸음은 가히 셀 만 하다. ()를 짓는 데에 있어서 붓을 잡고 곧바로 나아가서 얼음이 녹는 것처럼 생각지 않아도 완결된 詩歌文章이나 미사여구(美辭麗句)의 장식이 빛나고 성운(聲韻:억양에서 나오는 목소리)이 장양(?:방울소리)하였다.

일찍이 사()와 부()로 장옥(場屋:과거보는 장소)을 울리니 사람들은 초소(楚騷:屈原離騷經)의 유문(遺文)을 얻었다고 일렀고, 또한 문자(文字)나 필적(筆蹟)등이 옛날의 작자(作者)의 풍도(風度)가 있었다고 하였다. ! 하늘이 그 나이를 더 빌려주었다면 그 재주와 문체(文彩)가 마땅히 여기에 그치지 않았을 것인데, 마침내 중도(中道)에 요알(夭閼:일찍죽음)했으니 애석하다.

문집(文集) 네 권이 세상에 전한다.

() 하기를,

   결단성(決斷性) 있고 재능(才能)이 많으며,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한 자는   공자(孔子)도 정사(政事)를 할 수 있다고 허락 하였고,    겸능(兼能)하고 함께 잘함은 군자(君子)로 오히려 괴롭게 여겼다.    ! 오공(吳公)은 재주가 실로 남보다 뛰어났고   삼분(三墳:伏義, 神農, 黃帝)과 오전(五典:五倫)   깊은 뜻을 모두 꿰뚫었소.    일을 당하면 즉시 처리(處理)하여   사리(事理)의 요소(要所)를 확연(確然)히 밝혀냈네.    이미 대궐(大闕)에서 임금을 보필(輔弼)하고   또한 변방(邊方)에서 나라를 지켰다오.    北極에 있는 天地는 어지럽게 흩어지고   이무기와 용은 성이나서 횡행(橫行)하는데,    물을 건너고 산에 오르기를   평탄한 곳과 같이 했으니   충성(忠誠)과 수고로움 더욱 빛나네.    접빈사(?使)의 명()을 띠고   황국(皇國:중국)에 왕래(佐來)하니   국가(國家)에 초목이 우거져 무성한 빛이 되었고,    문채(文彩)가 밝게 빛났다오.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게 된 것은   어찌 근본을 영도함이 없었겠는가.    능히 부모(父母)를 공양하고 거상(居喪)을 잘함은   지극한 성품을 따랐기 때문이네.    젊어서 단사(彖辭:周易一卦를 말한 卦辭)와 계사(繫辭:周王文王易卦아래써서 놓은글)를 좋아하여   심오(深奧)한 뜻을 탐구(探究)했다오.    질박(質朴)하고 문채(文彩)가 있었으니 모든 아름다움이 모였다오.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기에 추부(樞府)에서 문사의 주도권을 맡아보았지.    어찌하여 이미 시험하고도 사용을 끝내지 못하였는가.    윤사(胤司:큰아들)가 빛나게 되었으니 거의 그 경사 돈독하였소.    내 그 산소에 시()를 지으니 빛이 나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최석정(崔錫鼎)은 짓는다.

忠烈公諱達濟神道碑銘(충렬공 휘달제 신도비명)

朝鮮國通訓大夫行弘文館副校理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知製敎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諡忠烈吳公帶藏碑銘幷序

後學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成均館事永安府院君金祖淳謹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傳李相璜謹書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金思穆謹篆

昔魯仲連?帝秦欲蹈海而死秦軍爲却仲連明春秋者然片言折新垣之口奪?秦之氣天下萬世之人與其爲高士而莫尙之非所謂知?近乎勇者歟勇者猶然?君子之成仁乎此文信國所以獨立於天下萬世有也今以魯連之勇合信國之仁又曷以稱焉嗚呼我丁丑南漢城下之?尙忍言哉據天險四十餘日爲將帥者?勉登?不敢發一矢相向爲宰相者縮頸袖手不能出一策辦賊??然坐而待斃可謂國無人焉然惟是斥和諸君子不忍背天王而與夷虜沫血灑灑固請君臣上下與孤城同靡碎何其烈也向使其言見用君臣上下決一死背城戰城中軍民將不下三五萬當時虜亦疲矣以數萬必死之士蹴旬月已疲之虜其勝敗未可知設不勝而亡其風聲威烈可以震天下而聳萬世其視夫忍痛衛寃苟全而遺?者相去果何如也力屈智窮而不忍墟其社稷者常情一時之私痛也天下無不亡之國而義不可屈於虜者君子萬世之大經也以匹夫之身立萬世之大經者盖千百年千萬人而僅一二有何同時孤城之中以斥和自首視死如錦者至於十一人之多也尙可日國無人焉乎哉然而主和賣國之徒外籍?虜內脅吾君盡縛忠義之人以先牽羊之禮何哉氷炭不可以同情薰?不可以同器君子小人勢不可以兩立也夫降等耳縱使虜擧三學士之名而索之亦不過迫吾降降?已矣不降亦已矣自首者亦多人矣終必以三學士塞於議降之後者庸?非主和者之志邪?其忍矣故尹吳兩學士相謂曰彼欲借我盡殺一時名流兩學士旣求仁而得仁至此寧復怨人而誣人其必有如見肺肝者矣嗚呼悲夫祖淳嘗見淸人所撰開國方略者其書三學士死節曰倡儀袒明敗盟?兵旣又見其文獻通考者其論朝鮮曰明之末年未嘗終始叛明猶爲重禮義之邦也噫議者尊攘之謂也袒者衛助之謂也其人旣殺矣猶不沒其忠義之實其國旣降矣猶明其不得已之情虜亦有人心乎然則彼脅主?賢之輩雖?功於虜與我之間愈足爲夷虜之所唾罵而不自覺不亦哀哉傳曰豈弟君子神所勞矣天將以萬世之大經任之三君子之身故默誘小人之衷以?三君子而成就之天心不其然乎嗚呼魯連陪臣也其心不出於尊王跡雖高辯實涉於縱橫信國宋臣也其義宜死於虜忠雖大人亦可以企及惟陪臣爲天子死夷狄得夫子春秋之大旨者天下萬世其吾東之三學士而已矣乎今上甲申忠烈吳公之孫慶元謂祖淳曰始先祖之被禍也洪尹兩公皆以衣冠葬獨吾先祖有所佩黃錦囊及遺衣帶陪奴奉而歸公繼配南夫人謂招魂而葬非禮也常佩持其帶囊日夜不?舍及及夫人卒葬于龍仁縣慕賢村坐子之原與前配申夫人成雙墳焉以遺衣帶囊?于雙墳間先祖遂無墓矣慶元懼其世遠而浸泯也欲樹益而標之公文正孫也求是文舍公伊誰且先祖維蹈義而死實主和者之所甘心也而世之無恥者或謂主和者未嘗?視吾先祖也公不可以不明祖淳曰然人之死也?魄下降塚墓之所由設也魂氣上升焄蒿之所由感也若公之死?魄所降雖不知其處英魂正氣必不安於腥?之域風馬尻輪安知不隨帶囊而東歸乎然則雖囊之?雖非今體魄所藏明靈之所憑依子孫之感焄蒿不專在於是歟烏可以不碑乃謹述 公咸仁之大節?沐而書之又撮公平生而系之詩詩曰首陽之吳族簪紳華胄遙遙繼振振慶積善累厥感帝帝降我公筏迷津萬曆己酉夏之季其日初八其時辰達濟其諱季輝字伯父秋灘?雲親母崔夫人洗馬女女儀無愆敎自娠蘭薰醴源性幷習孝友從幼富不貧十四撰進討虜疏遼瀋皆沒歲在辛乙丑委禽娶于申再翌司馬登成均林溪晦谷皆同榜至今追思亦彬彬甘一?杖考憂宅?五癸酉腹悲呻戌春射策魁別試其文爭誦傳世珍初拜典籍秋榮覲續絃南楣?明春歷郞禮兵入雷肆薇垣栢府遷官頻丙子由副陞修撰八條懇懇時政陳是年夏五斥虜和?如胡生誅檜倫聲名赫赫動朝野自此無奈??人冬十二月日甲申牧馬東嘶漲?塵公時徒?上南漢兄弟相携扈去?却聯忠貞拜短?雄辭直氣兩??請斬?人警大衆聖志堅守贍與薪督戰御史徒名耳義惟自靖爲潔身?人挾?訌君父謂言急索斥和臣惟十一賢爭就死同心同辭不逡巡聖主垂淚不忍決廷議紛?日因循公復慷慨語忠貞子與吾可塞?隣忠貞欣然共草奏虜劒雖利臣不嚬群奸迫脅計愈急悍校驕兵?楓宸萬人哭送西門道哭靜嗚嗚于蒼旻蒼旻?白日苦春風南冠隨北輪路口三裁寄兄札慰母與妻詩凄新胡兒?舌誇忠純獻以肴羞敬如賓瀋關深黑?虎窟???內血染脣公抗其辭罵?狗虜敢殺公不敢嗔首夏戌子是何日公乘洗氣奄歸眞北方不可以止此?見犬羊夜鬼燐化爲蝴蝶托君夢平生神契如飮醇古來人生孰無死孟云取義孔成仁天常人紀永不墜民禽豚?公神公神在天如日月光華先被左海垠列聖含痛憫不弔褒奬節義垂恩綸贈之上相諡忠烈侑祠錄後勵臣民龍阡雙墳屹相?兩配後先??遺衣帶囊其間?行人指點涕沾巾嗟爾賢嗣恩不?白首乞文謀貞珉余??毫屢扼?二百年事如隔晨嗚呼天壤復地?公名公靈乃可湮

崇禎紀元後四戊子立大提學永安府院君金祖淳謹撰

 

[譯解]

조선국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부교리(行弘文館副校理) 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기주관지제교(春秋館記注官知製敎)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 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世子師) 시 충렬(諡忠烈) 오공(吳公) 대낭장(帶囊藏) 비명병서(碑名幷序).

후학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영부사(領敦寧府事) 겸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성균관사(成均館事)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삼가 찬술함.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이상황(李相璜) 삼가 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김사목(金思穆) 전액 함.

옛날 노중연(魯仲連)이 진나라가 황제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바다에 빠져 죽으려 하니 진나라 군대들이 물러갔다.

중연은 춘추에 밝혀지지 못했으나 한마디 말로 신원(新垣)의 입을 막았고 장한 진나라의 기운을 꺾었다. 천하 만대의 사람들이 그를 고상한 선비라 하면서도 그를 숭상함이 없으니, 이른바 부끄럼을 아는 것이 용맹에 가깝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용감한 사람도 오히려 저렇거든 더구나 군자가 인()을 성취함이랴!

이것은 문신국(文信國)이 홀로 천하 만세에 설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제 중연의 용기와 신국(信國)의 인()을 합 하였으니 또 어떻게 말하리요.

! ! 내 정축년에 남한산성 아래서의 치욕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천험(天險)으로 버틴지 여일 만에 장수들은 힘써 보루에 올라서도 감히 서로 맞아 한 개의 화살도 쏘지못하고, 재상들은 목을 움츠리고 수수방관 하면서 능히 적을 물리칠 계책도 내지 못하고, 두려워 벌벌 떨면서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니 정말 나라에 인재가 없다 하리로다. 그러나, 오직 척화파의 여러 군자들이 차마 천왕을 배신하지 못해서, 오랑캐와 맞서서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군신 상하가 외로운 성과 더불어 죽기로서 버텨야 한다고 굳게 청하니 어찌 그리도 장렬한가?

지난날 그 말을 받아들여 군신상하가 한번 죽을 각오로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웠다면 성중의 군민들이 장차 항복지 않았을 것이고, 만의 당시 오랑캐들도 패하리라. 수만의 필사의 군대로서 이미 피로해진 오랑캐와 달포만 더 싸웠더면 승패를 알 수 없없으리라. 설사 이기지 못하고 망했다 하더라도, 풍성(風聲)과 위열(威烈)이 천하에 떨쳤을 것이고 만대에 드높았을 것이다.

저 아픔을 참고 원한을 품은 자와 구차하게 보전하여 치욕을 남긴 자들을 살펴 보면 서로의 차이가 과연 어떠한가?

힘이 다하고 지혜가 다해도 차마 종묘사직을 폐할 수 없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떳떳한 도리이니 한 때의 사사로운 아픔이다. 천하에 한번 망하지 않는 나라 없지만 의리로서 오랑캐에게 굴복할 수 없는 것은 군자로서 만세의 큰 본보기이다.

필부로서 만세의 대경(大經)을 세운 사람이 대개 천 백년 천만사람 중에 겨우 한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하여 한꺼번에 외로운 성중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자수하여 죽임 당하기를 순순히 한자가 一一명이나 되는 많은 수에 이르렀는고!

그런데도 오히려 나라에 인재가 없다고 하랴!

그러나, 화친을 주장하는 매국의 무리가 밖으로는 강한 오랑캐의 힘을 빌고, 안으로는 우리 군왕을 협박하여, 충성스럽고 강직한 사람들을 포박하여 앞장서서 양을 끌고가듯 무례함을 저지름은 무슨 까닭인가!

얼음과 숯불은 같이 할 수 없음이고, 향미나는 풀과 악취나는 풀이 한 그릇에 담겨질 수 없듯이, 군자와 소인도 한 조정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니라. 비록 오랑캐로하여금 삼학사(三學士)의 이름을 열거하여 찾았어도, 역시 우리를 협박하여 항복하게 하는데 지나지 아니 할 뿐이니, 항복을 해도 끝나고 항복을 아니해도 끝나는 일이다. 자수한 자들도 역시 많고 많거늘 마침내 반드시 삼학사로서, 항복하여 화친하자는 말을 가로막는 자라고 함이 어찌 저 화친을 주장하는 자들의 말이 아니겠는가?

! ! 슬프다! 그것이 차마 할 수 있는일이 겠는가?

(), (), 양학사가 서로 일러 말하되저들이 우리를 빌어 한 때의 명류(名流)를 다 죽이려 한다하니 두 학사가 이미 인()을 구하여 인을 얻은 자이다.

이에 이르러 어찌 또 다시 남을 원망하고 남을 무고하리요. 그들은 반드시 폐간(肺肝)을 보는 듯한 자이다.

! ! 슬프다! 조순(祖淳)이 일찍이 청인(淸人)이 찬술한 개국방략(開國方略)이란 책을 보니 그 글에 삼학사의 사절(死節)을 일러 말하되, 명나라의 퇴폐한 군사를 모아 군대를 조직하기를 맹서하였다고 했고, 또 그 문한통고를 보니 거기에 조선을 논하여 이르되명나라 말년에 일찍이 처음부터 끝까지 명나라를 배반하지 않으니 오히려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슬프다! 의논하는 자는 왕도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침을 이름이요, 袒者는 위조(衛祖)를 이름이다. 그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도 오히려 그 충의(忠義)의 실상은 멸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나라는 이미 항복하였건만 오히려 부득이한 실정을 밝히니 오랑캐에게도 정말 사람의 마음이 있단말인가? 그렇다면 저 군왕을 협박하고 어진 이를 해친 무리들은 비록 오랑캐에게 공을 세우긴 하였지만, 우리나라에는 잘못하였으니 족히 오랑캐도 그들에게 침을 뱉고 꾸짖었거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에 이르기를 아름답고 공손한 군자 귀신도 위로한다하였으니 하늘이 장차 만대의 대경(大經)으로서 군자의 몸에 맡기고저 하였으므로 묵묵히 소인의 마음을 꾀어 군자를 곤액스럽게하여 인을 성취케 하였으니 천심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 슬프도다! 노중연은 배신(陪臣)이다. 그 마음이 왕을 존중하는데 지나지 않았으니, 그 자취가 비록 고상하였으나 말은 실로 합종, 연횡을 일삼던 사람들도 할 수 있다. 신국(信國)은 송()나라 신하이다. 그 의로움이 마땅히 오랑캐에게 죽어서 충성이 비록 크기는 하지만 대신들도 충분히 바랄 수 있으련만, 오직 배신(陪臣)이 천자를 위하여 이적(夷狄)에게 죽임을 당한데 미쳐서는 공부자의 춘추대지(春秋大旨)를 얻은 것이니, 천하 만대에 우리 동방에 삼학사 일 뿐이다.

금상 갑신년에 충열 오공(吳公)의 손자 경원(慶元)이 조순(祖淳)을 일러 말하되처음 선조가 화를 당함에 홍(), () 양공은 모두 의관을 갖추어 장례를 지냈으나, 유독 우리 조상은 차고있던 누런 비단주머니와 남기신 의대가 있어 배노(陪奴)가 받들어 공의 계배(繼配) 남부인(南夫人)에게 돌려주고, 혼을 불러 장례하라 이르니 예의가 아닙니다.

항상 그 대낭(帶囊)을 차고 밤낮없이 잠시도 버리지 아니 하였다가, 부인이 죽음에 용인현 모현촌(墓賢村) 자좌(子坐)의 산에 전부인 신()씨의 곁에 안장하여 쌍분(雙墳)을 만들고, 남긴 의대와 황낭을 쌍분 사이에 묻었으나 선조는 마침내 묘가 없습니다. 경원이 세상의 흐름에 잊어버리게 될까 두려워서 비석을 세워서 표하려 하오니, 공은 문정(文正)의 손자이시라 이 글을 구함에 공이 아니면 누구에게 부탁하겠나이까? 또 선조가 비록 의롭게 죽었으나 실상 화친을 주장한 사람들은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부끄럼이 없는 자들은 더러는 주화(主和)자를 일러 일찍이 우리 선조를 원수같이 보지 않았다고도 하옵니다. 공이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 입니다라고 하거늘 조순(祖淳)이 이르기를 그렇습니다. 사람이 죽음에 체(?)와 백()이 하강하기 때문에 무덤을 만들고 혼과 기(魂氣)는 상승하기 때문에 향을 피워 감응토록 합니다. 그렇거늘 공과 같은 이가 죽음에 체백이 하강하여 비록 처할 곳을 모른다 해도 영특한 혼의 정기(正氣)는 반드시 성단(?)의 영역에 불안하리라. 풍마구륜(風馬尻輪)이 어찌 대낭(帶囊)을 따라 동방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리요. 그렇다면 대낭을 묻음이 비록 체백이 거처하고 명령(明靈)이 의지할 바 아니라 하더라도 자손의 감동에 의하여 향기로움이 여기에 전재(專在)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가히 비명을 쓰지 않으리오. 이에 삼가 공의 성인(成仁)의 대절(大節)을 지어, 세수하고 목욕한 연후에 쓰고또 공의 평생 업적을 모아 이에 표하노라.

시에 이르기를

수양(首陽)의 오공은 훌륭한 집안 족속으로 꽃다운 자손 멀리 계속하여 이름을 떨친다.

많고 많은 경사와 착한 덕이 그 임금을 감동시켰네. 국왕은 항복하였으나 우리 공만은 갈 바를 잃으셨다.

만력 기유년 여름 초파일 진시에 태어났다.

달제(達濟)는 그의 휘이고 계휘(季輝)는 그의 자이다. 백부는 추탄(楸灘)이고 만운(晩雲)은 부친이다. 어머님 최()부인은 세마(洗馬)의 딸이신데, 여자의 행실에 허물됨이 없으시고 태아적부터 교육이 충실하였다. 난초같이 향기롭고 단술의 근원같은 그 성품과 습성에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어릴적부터 부하여 가난함이없었다.

十四세에 발탁되며 오랑캐를 토벌하였고, 끝내는 요동과 심양에서세상을 마치셨다. 전안례를 올리고 신씨(申氏)에게 장가를 들으셨다. 다시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임계(林溪)와 회곡(晦谷)은 모두 한 해에 급제하였다. 지금 추모하여 생각해 보아도 또한 빛나는 일이로다. 二一세에 아버님의 상을 당하였고 二五세 계유년에 마음이 상하였다. ()년 봄에 사책(射策)과 별시(別試)에도 장원이 되었다. 그들을 다투어 외워 세상에 보배처럼 전해온다.

처음에 전적(典籍)에 봉해졌다가 가을에 영화로움을 입으셨다. 아내를 잃고 다음해 봄 남씨댁에서 다시 아내를 맞이하였다. 예조와 병조의 낭을 역임하였고 뇌사(雷肆)에 들어갔다. 미원(薇垣) 백부(栢府)로 자주 관직을 옮겼다.

병자년에는 수찬(修撰)에 올라 여덟가지 조목으로된 시정책(時政策)을 간곡히 아뢰었다. 이해 여름에 다섯 번씩이나 오랑캐와 화친하자는 의논을 물리쳤고 늠늠한 모습 오랑캐도 두려워 하였다.

그 이름 밝고 밝게 조야에 떨쳤고, 이로부터 오혐(??)한 사람들도 그에게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겨울 一二월 갑신일에 말을 몰아 동으로 향하여 울며 티끌을 일으켰다. 공은 이때에 걸어서 남한(南漢)산성에 올랐으며, 형제가 서로 손을 이끌고 호종하였다. 충정(忠貞)에 연합하여 짧은 차문(?)을 올렸다. 웅대한 말과 곧은 기운이 깊고 깊도다. 간사한 무리를 참수할 것을 주청하여 대중을 놀라게하고 성지(聖志)를 굳게지켜 와신상담 하기도 하였다. 독전어사(督戰御史)란 헛된 이름 뿐이고 외로움으로 자정(自靖)하고 몸을 결백하게 하였다. 적을 돕는 간사한 무리가 군부(君父)를 어지럽혀 급히 척화(斥和)신을 찾았다. 오직一一명의 어진 신하들은 다투어 죽음에 나아가니 마음과 말을 같이하여 우물쭈물 후퇴함이 없었다. 성주는 눈물을 흘리며 차마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조정 의논이 분분하여 날마다 우물쭈물 하였다. 공은 다시 분개하여 충정(忠貞)에 혼연히 함께 초주(草奏)를 올려 오랑캐의 칼날이 비록 날카로우나 신은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 간신들이 협박하니 계책이 더욱 급하였고 사나운 교리와 교만한 군대가 궁중을 흔들었다. 만인이 서문 길에서 울며 전송하니 곡성이 진동하여 하늘에 닿았네. 푸르던 하늘도 몽롱해지고 햇볕도 무색해 하였다. 봄바람 속에 남관(南冠)이 북륜(北輪)을 따라갔다. 떠나는 길에 세 번씩이나 형에게 편지를 보내서 어머니와 아내를 위로하니 그시가 처량하였네.

오랑캐를 꾸짖어 충순(忠純)을 과시하니 술과 안주를 드리고 손님같이 공경하였다. 심양은 깊고 깊어 마치 호랑이 굴속과 같았으며 사냥개가 고기를 다투어 입술에 피를 묻히는듯 하였다네. 공은 올바른 말로 항거하여 오랑캐를 꾸짖으니 오랑캐는 감히 공을 죽이긴 해도 공을 꾸짖지 못하였네. 초여름 무자일은 이 어떤날인고. 공이 호기(浩氣)를 타고 문득 신선세계로 돌아간 날이라네. 북방은이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낮에는 개와 양을 보고 밤에는 귀신의 불을 보았네.

화하여 호접(蝴蝶)이 되어 국왕의 꿈에 나타나니 평생에 신과 같음이 순주를 마시듯 하였네. 예부터 죽지않는 사람 누가 있는고. 맹자는 의를 취했고 공자는 인을 이록하셨네. 천상(天常)과 인기(人紀)가 길이 떨어지지 아니하였으니 백성들과 금돈(禽豚)을 면하게 된 것은 모두가 공의 신비로움 때문일세. 공의 신이 하늘에 있어 일월과 같이 광화가 먼저 행동에 비치도다.

열성(列聖)이 원한을 품고 민망스러워 조문도 못하시고 절의(節義)를 포상하고 사륜(思綸)을 내리셨다.

상상(上相)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하셨으며 두 부인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둔(?)에 나아갔다. 남기신 의대와 주머니를 그 사이에 묻었으니 행인이 손가락질하여 가르치고 눈물 흘려 수건을 적시도다.

슬프다! 어진 후손이 추모를 끊지 못하여 백수로 글을 빌어 정맹(貞氓)을 꾀하도다. 내 변변치 못한 글로 비문을 지으니 여년 일들이 마치 하룻 저녁과도 같도다.

슬프다! 하늘이 무너져 땅을 덮어도 공의 이름과 영혼 이에 가히 떨어지리로다.

숭정기원후무자[純祖二八年(一八二八)]에 세움

大提學 永安府院君 金祖淳 지음

西坡公諱道一墓碣銘(서파공 휘 도일 묘갈명)

先府君吳氏氏出海州諱道一字貫之號西坡高麗檢校軍器監諱仁裕之后曾祖繕工監監役贈領議政諱希文祖領議政忠貞公楸灘先生諱允謙考典籤贈吏曹判書諱達天?贈貞夫人漢陽趙氏都事諱幹女右議政涓九世孫仁祖乙酉正月八日壬辰公生癸丑擢文科事顯宗初年拜兼說書歷淸顯若三司至大司諫大司憲副提學選湖堂政府舍人承旨副都大司成副槐院備局提調吏曹佐正郞??判提學弘藝文自衣緋薦文衡從亞卿擬?宰四典兩館大提學漢城府尹兵曹判書受命再赴燕外任蔚珍淸風星州開城留守江原京畿觀察使開畿未赴蔚與江斥補也壬午謫長城癸未二月四日終于鵬舍春秋五十九丙戌復官致祭當?己酉贈左?成府君高明峻拔受氣純淸學語己神詣始謂學乃吾固有也從事性理究淵奧致思索過苦疾作間屈意公車釋褐以文學際過肅廟庚申待講筵?久寵數絶諸學士欲盡已報君身任世道庶抑貴倖而尊朝廷杜私枉而神公法庶立士論而平?乖扶國?而遂民生入銓後注措先激揚甲戌更化益盡言無吐茹於是怨?皆巨室也承喉氣者起以自劾必於中其?上察衆惡輒以知臣莫如君卿心惟予知之爲敎不一二斥言者嚴而曰不正也曰伐異也東藩之出也手書御詩序贈行以寵之序以慨嘆世道詩曰去年塞北幾瞻雲今日關東倍戀君元來一片丹衷炳末路??豈足云賜詩亞卿千古君臣間所罕有感泣曠恩苟朝政之大者無??於貴勢禍福之關位遇盛而忌怨愈輳?張科賊之飛書鍛試案而不?奇貨死囚之亂言重?人而莫證行譴非上之意經歲始允之追復時聖敎尤明?此乃府君立朝源流而受知於上見仇於下??也一節三十?秉直無撓讒?日肆流坎間之而一片忠愛之丹心荷上獨知倚遇終始不替識者謂有不世之遇而用未究其有年又嗇期?若與不過同歸實世運盛衰之關而亦天也位上卿而無一區屋子一畝一指之增文章政事淸德名節卓識宏?之照人耳目而暴於當世者有士言輿口之誦不肖等曷敢私有闡揚而惟聖人之恩言日星昭揭後之君子有以尙論而知之云夫人豊壤趙氏吏曹判書松谷文簡公諱復陽女右議政浦渚先生翼孫篤孝敬有女士行生壬午卒壬子不育後夫人延日鄭氏刑曹佐郞贈吏曹?議諱淹女典翰彦浩六世孫莊淑慈儉諸黨誦?德生丙申卒己亥丙子遷公州龍伏洞舊壙合?局內負亥原四男遂元內待敎官後官校理旋收科名子命觀郡守遂郁佐郞繼子命溥遂燁牧使子命大命久命有命好遂采副提學子命洙命溥命深命洙子進士彦思命大子彦瞻命溥子彦謨命久子彦受命深子後命觀孫曾適人與幼不載不肖孤遂燁遂采等泣血謹識

崇禎紀元後三丁丑八月日立遂燁書前面使命溥書陰記

 

[譯解]

선부군(先府君) 오씨(吳氏)는 계통(系統)이 해주(海州)에서 나왔다. ()는 도일(道一)이요, ()는 관지(貫之)요 호()는 서파(西坡)이니, 고려(高麗)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 인유(仁裕)의 자손이다. 증조(曾祖)는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증령의정(贈領議政) () 희문(希文)이요, 조부는 영의정(領議政) 충정공(忠貞公) 추탄선생(楸灘先生)이니 휘()는 윤겸(允議)이다.

아버지는 전첨(典籤)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 달천(達天)이요,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 도사(都事) () ()의 따님이요, 우의정(右議政) ()세손(世孫)이니, 인조(仁祖) 을유(乙酉) 정월 일 임진(壬辰)에 공을 낳았다.

공은 계축(癸丑)에 문과(文科)에 뽑혔고, 현종(顯宗) 초년에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청현(淸顯)을 거쳤으니 삼사(三司)로서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부제학(副提學)에 이르고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정부(政府)의 사인(舍人), 부승지副承旨), 도승지(都承旨), 대사성(大司成), 승문원(承文院)과 비국(備局)의 제조(提調), 이조좌랑(吏曺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 참의(?), 참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비의(緋衣)로부터 문형(文衡)에 천거되었다. 아경(亞卿)으로부터 총재(?)에 추천되었고, 네번이나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한성부윤(漢城府尹),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며, 임금의 명령을 받고 두 번이나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 외임(外任)으로는 울진(蔚珍), 청풍(淸風), 성주(星州)와 개성유수(開城留守), 강원(江原), 경기(京畿)의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개성(開城)과 경기(京畿)에는 부임하지 않았고, 울진(蔚珍)과 강원(江原)은 배척받아 임명된 것이었다.

임오(壬午)에 장성(長城)으로 귀양갔다가 계미(癸未) 일에 복사(鵬舍)에서 졸()하니 춘추(春秋)五十九였다. 병술(丙戌)에 복관(復官)되고 임금이 제사를 내렸다. 금상(金上) 기유(己酉)에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부군(府君)께서는 고명(高明)하고 준발(峻拔)한데다가 기품(?)을 타고난 것이 순청(純淸)해서 말을 배우자 이미 신()에 이르렀고, 비로소 학문이 곧 나의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성리학(性理學)에 종사(從事)하여 깊은 것을 연구하고 생각을 지나치게 하여 병이나서 과거에 뜻을 두지 못했다.

벼슬에 나가자 문학(文學)으로 숙종(肅宗)을 만나서 경신(庚申)에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을 시작하여 가장 오래 계속하여 임금의 사랑이 여러 학사(學士)들보다 뛰어났다. 이에 몸을 다하여 임금에게 보답하고 내 몸이 세도(世道)를 책임져서 거의 귀하게되는 요행의 길을 억제했으며, 조정을 높이고 사사로운 잘못을 막고 공법(公法)을 펴서 거의 사론(士論)이 서게 되었으며 어그러지는 것을 평탄히 하고 국맥(?)으로 붙들어서 민생(民生)을 완전히 했으며, 전형(銓衡)의 자리에 들어간 뒤로는 일 처리하는 것은 뒤에 하고 격양(激揚)하는 것을 먼저 했다.

갑술(甲戌)에 경화(更化)하자 더욱 말을 다하고 남김이 없자, 이에 공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자는 모두 거실(巨室) 들이었다. 이에 그들의 입김을 받은 자들이 일어나서 스스로 탄핵하여 기어히 그 해독을 입히려하니, 임금이 여러 사람들의 악한 것을 살피고 난 뒤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자 없는 것이니 경()의 마음을 오직 내가 아노라하는 하교를 내렸다.

한 두 번 배척해 말할 뿐이 아닌 자들에게는 엄격히 말하기를, 바르지 못하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공격하는 것이다. 동번(東藩)에서 나온 말이다하고 손수 어시서(御詩序)를 써서 공의 가는데에 주어 사랑했는데, ()는 세도(世道)를 개탄(慨歎)한 것으로서, ()에 말하기를, 지난 해에는 새방 북쪽에서 몇 번이나 벗을 그리워 했는가. 오늘은 관동(關東)에서 갑절이나 임금을 그리워하네. 원래 한 조각 붉은 충성이 빛나니, 말로(末路)에 두려워 하는 것을 어찌 족히 말하랴. <去年塞北幾瞻雲今日關東倍戀君元來一片丹衷炳末路??豈足云>했는데 시()를 아경(亞卿)에게 내린 것은 천고(千古)의 군신(君臣)사이에 드물게 있는 일로서 그 남다른 은혜에 감격하여 울었다.

진실로 조정에서 큰 것은 귀한 세력과 화복(禍福)사이에 주저함이 없는 것인데, 지위가 높을 수록 꺼림과 원망이 더욱 모이는 것으로서 허풍을 떠는 과적(科賊)의 익명(匿名)의 글이 시험보는 책상에 떨어지는 것이 끝이 없고 진귀한 보배와 사형받은 죄수의 어지러운 말을 엄중히 그 날 해도 증명할 수가 없다. 책망을 하는 것이 임금의 뜻이 아니라 해를 지나 비로소 윤허해서 추복(追復) 되었다. 이때 성교(聖敎)가 더욱 명석(明浙) 했으니 이는 곧 부군(府君)의 입조(入朝)한 원류(源流)로서 임금의 아는 것을 받고 아랫사람에게 원수로 보인 것이 곧 그 개요(槪要)이다.

한결같은 절개로 三十년 동안 곧은 것을 잡고 꺾이지 않아 참소와 들추어 냄이 날로 방자하고 귀양가고 고생하는 일이 중간에 있었어도 한 조각 충성과 사랑의 붉은 마음이 임금의 홀로 알고 보태지 않았다.

문장과 정사에 있어서의 맑은 덕과 이름있는 절개, 그리고 뛰어난 학식과 넓은 규모(規模)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치고 당시 세상에 알려져서 선비의 말과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불초(不肖) 등이 어찌 감히 사사로이 이를 천양(闡揚) 하리오마는 오직 성인(聖人)의 은혜로운 말은 해와 별같이 뚜렷이 걸려있으니 뒤의 군자(君子)들이 오히려 의논하여 알게 할 것이다.

부인은 풍양조씨(豊壤趙氏) 이조판서(吏曹判書) 송곡(松谷) 문간공(文簡公) () 복양(復陽)의 따님이요, 우의정(右議政) 포저선생(浦渚先生) ()의 손녀인데, 효도와 우애에 독실하여 여사(女士)의 행동이 있었다. 임오(壬午)에 나서 임자(壬子)에 졸() 했는데 자녀를 기르지 못했고, 후부인(後夫人)은 연일정씨(延日鄭氏) 형조좌랑(刑曹佐郞) 증 이조참의(贈吏曹?) ()의 따님이요, 전한(典翰) 언호(彦浩)세손(六世孫)으로서 엄숙하고 맑고 자애롭고 검소하여 여러 사람들이 높은 덕을 칭송했다. 병신(丙申)에 나서 기해(己亥)에 졸()하여, 병자(丙子)에 공주(公州) 용복동(龍伏洞) 옛 묘지의 그 국내(局內) 해좌(亥坐) 언덕에 합폄(?)했다.

남을 두었으니 수원(遂元)은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서 뒤에 교리(校理)로 옮겼다가 이내 과명(科名)을 거두었고 그 아들 명관(命觀)은 군수(郡守)이다. 수욱(遂郁)은 좌랑(佐郞)이니 계자(繼子)는 명부(命溥)이다. 수엽(遂燁)은 목사(牧使)이니 그 아들은 명대(命大), 명구(命久), 명유(命有), 명호(命好)이다. 수채(遂采)는 부제학(副提學)이니, 그 아들은 명수(命洙), 명보(命溥), 명심(命深)인데 명수(命洙)의 아들은 진사(進士) 언사(彦思), 명대(命大)의 아들은 언첨(彦瞻)이요, 명부(命溥)의 아들은 언모(彦謨), 명구(命久)의 아들은 언수(彦受), 명심(命深)의 아들은 뒤에 명관(命觀)에게 출계(出系)했다.

손자, 증손과 남에게 출가한 사람과 어린 자는 여기에 싣지 않았다.

불초고(不肖孤) 수엽(遂燁), 수채(遂采)는 피 눈물을 흘리면서 삼가씀.

수엽(遂燁)이 전면(前面)을 쓰고 명보(命溥)로 하여금 음기(陰記)를 쓰게함.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삼정축(三丁丑) 월 일에 세움.

[]

<緋衣>:붉은비단옷. 오품(五品)이상의벼슬아치가입던옷.

<文衡>:대제학(大提學)의별칭.

<亞卿>:()의다음가는벼슬. 참판(?)을 말함.

<?>:육관(六官)의장().

<?>:홍문관(弘文館)과예문관(藝文館).

<鵬舍>:조그만집

<巨室>:세력이있는가문(家門).

<上卿>:상위(上位)의경().